한국 선교초기의 비사(?史) 중,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운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선교사 집에 그 동네의 유지 양반이 찾아왔었다. 마침 그 때 선교사는 비지땀을 흘리며 정구를 치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의관을 갖추고 담뱃대를 흔들며 찾아 온 양반은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 양반, 그렇게 힘든 일은 아랫것들에게나 시키시지요!” 현대사회의 ‘돈이 양반인 때’에 이 말은 우스운 말로 들리지만 우리나라 근대화 이전의 사상배경에는 ‘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었던 때의 좋은 예다. 지금도 ‘화이트칼라(white color) 와 블루칼라(blue color)’로 양분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끼가 쓴 글 ‘한국의 붕괴’에서 “한국은 장인정신이 없다는 점과 양반근성 탓으로 노동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사람의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지적하고 있는 이 두 가지를 새겨서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상관관계의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굳이 이 둘을 갈라놓을 필요도, 합쳐놓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양반근성과 진취적인 개척정신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성경적 개념으로 바꾸면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과 그 특권을 지닌 자로서 사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권과 사명은 함께 가져야할 정신이요, 가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특권과 사명을 분리하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에는 노동은 신성함이었다. 그래서 구약의 노동의 개념은 축복이다. 신약에서 노동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이다. 즉, 노동은 거룩함과 축복, 그리고 사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한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악의 근본이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악의 근본이다. 부자가 되려면 베풀어라.” 노동은 저주가 아니다. 노동은 축복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비지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