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는 나와 우리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면 내 아내를 ‘우리아내’라고 한다. 그러면 내 아내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말은 이런 식의 말이 많다. ‘우리학교, 우리교회, 우리집, 우리나라, 우리방’ 등 온통 내 것은 없고 우리의 것만 존재한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생각에는 공동체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전 까지는 ‘나’라는 존재를 ‘우리’ 속에서 찾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나를 위한 것으로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하게 생각한다. 공동체를 ‘인맥’이라는 말로 미화시켜 자신의 인적자원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부터 의존적 존재이다. 공동체는 생득적 생존을 위한 관계다. 그러므로 홀로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시형 박사는 ‘행복한 독종’에서 “캘리포니아대학의 래리 셔비츠 박사팀은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녹음해 분석했다. 그 결과 ‘나, 나의, 나는, 나에게’ 등 ‘나’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심장질환을 앓게 될 확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마음을 닫고 ‘나’의 중요성만 강조할 때 심장과 몸은 고통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나와 너만 있고 우리가 상실된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너를 짓밟고 내가 살기 위해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아니,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의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없는 나와 너 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모든 것이 흑백논리로 끝을 맺는다. 모든 것이 경쟁구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여야 한다. 형제일지라도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그것이 자신이 살 길인 것으로 알았지만 아벨은 죽어서도 말을 했고, 가인은 살아서도 죽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살아야 모두 사는 길이다. 우리는 서로를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 나만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살기 위한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