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문맹자율이 2.1%로 세계 46위로 발표된바 있다. 0.1%이하인 나라가 20여 개국인데 비하면 아직도 높은 문맹률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과거에는 문맹자에 대한 인권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문맹자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20년 8월 18일 제 19차 수정헌법으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북부에 비해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흑인의 교육수준이 떨어지던 당시 이를 이용해 문맹자의 투표권제한과 같은
법규를 만들고, 투표용지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문맹자에게도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을 구술시험을 통해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문맹의 또 다른 개념이 생겼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1세기의 문맹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한 후에 교정하고 재학습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고착화된 지식, 새로운 학문과 정보에 대한 무능을 또 다른 문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컴맹으로 사는 것도 일종의 문맹인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것보다는 배우려는 의지와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사회에서 학습을 멈추면 나이에 관계없이 이미 늙은 사람이다. 반대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영적 문맹자가 있다. 더 이상 영적 성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 문맹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3~14).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영적 문맹자인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있는가? 주님은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닫혀져 있어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자.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자. 그리고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자. 우리교회는 영적 문맹률 0%를 이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