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머리와 가슴에 담아 두고 산다. 대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은 머리에만 담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슴에 담아둔 사람이나 사건은 잊혀 지지 않는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상처로 남게 하는 것들은 머리에 기억된 것이 아닌 가슴에 남겨진 것들이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 보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기억시키려면 내가 먼저 주고 배려하여 감동을 주어 머리가 아닌 가슴에 남게 하면 된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할 사람 중에 정읍에 사는 촌부(村夫)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정읍에 산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1977년 12월 초순 토요일 귀경길에 정읍역에서 열차를 탄 그 사람이 내 옆 자리에 와서 앉아 서울역에서 같이 내렸기 때문이다. 정릉에 사는 누이 집을 가는데 갈 바를 몰라 하기에 내가 시내버스를 같이 타고 목적지를 물어서 누이 집까지 모셔드리고 나는 통행금지에 걸려서 내가 섬기고 있는 돈암동의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주일예배를 드렸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이유는 내가 데려다준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순수함 때문이다. 초면인 나를 믿고 데려다 주는 대로 따라온 것과 헤어지면서 꼭 정읍의 자기 집에 꼭 한 번 오라는 진심어린 말과 거칠고 큰 손으로 쥐어준 버스요금 때문이다.
나의 재능과 실력은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되지만, 내가 배려해준 인간적인 일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된다. 그리고 가슴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내 편이 되어 나를 응원해 준다. 남편을 남의 편으로 기억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내의 가슴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의 가슴으로 기억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때부터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까지도 남의 편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무적이고 피동적인 관계로는 누구도 내편으로 만들지 못한다. 금년 한 해 동안에 내 가슴에 남겨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가슴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며 금년 남은 한 달을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