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은 청빈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았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청빈은 무능력의 한 부분으로 치부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다. 논어 술이편에 “飯蔬食飮水(반소사음수)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 樂亦在基中衣(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이라고 했다. 즉,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고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나에게는 뜬 구름 같구나.’이다. 청빈낙도의 대표적인 시라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무소유의 덕을 예찬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인생이 아닌가? 나그네로 세상을 살다가는 것이 인생인데,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야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산다면 세상에서 싸움과 전쟁, 부정과 부조리, 시기와 질투, 그리고 굶주림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 때 누가 일을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고, 누가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현재 세계 인구는 70억이 넘었다. 가히 지구는 만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500만 명의 어린이가 굶어죽는다고 이탈리아의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보도했다. 1년에 500만 명이니, 하루에 만3천5백 명꼴, 매 시간 600명 정도의 어린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 죽어가고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에서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1절 상)고 말씀하셨다. 같은 말씀인 병행구절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하게 ‘육체의 주림이 아닌 의에 주림’이라고 하셨다. 정말 육체의 주림이 인간에게 복일까? 성경은 분명하게 영육 간에 풍성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율배반적인 말씀인가? 아니다. 부나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부(富)나 빈(貧)이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에서 주린 자가 복이 있음은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린 자가 복이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 위해서, 의를 위해서, 교회 위해서, 복음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주린 자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