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의 양시론(兩是論)의 일화를 되새겨보자. 황희 정승이 자신의 의견이나 합리적 판단력이 없어서 양시론을 취했을까? 시기, 갈등, 반목, 대립, 투쟁 등을 벗어나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여 조화와 안정, 평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대의(大義)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 흑백논리의 뿌리 깊은 사고를 가지고 살고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극히 작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부정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자기의 의견일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입장도 있다. 이것을 견해라고 한다. 금년 4.11총선에서도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언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날이 올 것인지.....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불가능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한 아홉보다는 불가능한 하나를 말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가능한 하나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자고 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스즈키 오사무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먼저 하지 말라. 일단은 스스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어떻게 하면 가능한지를 생각하고 대안을 제시하라. 할 수 없는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불가능이란 단어 자체를 잊어버려라. 그것이 바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진리는 유일성과 영원성, 또는 불변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늘과 같은 다원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실용주의가 진리이지만 진리는 영원불변하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것들은 모두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그렇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것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야한다. 그리고 타협하고 조율해야한다. 가능성도 마찬가지이다. 펄벅 여사는 “불가능하다고 입증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도 현재까지만 불가능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헨리 포드 역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옳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옳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불가능은 사실이 아니며 단지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그러나 신앙은 다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능력과 내 사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주님의 견해를 갖는 것이다. 모든 일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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