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 까지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제물을 삼으셨다. 왜 이런 사랑을 인간에게 주셨을까? 그것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다.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사화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용서는 잊음일까?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만 남는 게 아니라 여전히 가슴에 맺혀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남아있는 것이 느껴져 답답하다. 분명하게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용서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미첼 바첼레트(Ver?nica Michelle Bachelet Jeria) 칠레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때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분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우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그런 기억과 분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는 아니다. 잊혀 진 것은 포기다. 내 능력 밖의 일을 체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무능력의 한 부분이다.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무능력이요, 비굴함이다.
용서해야한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로드 하버트(Herbert A. Lord)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용서의 다리를 많이 놓아야한다. 용서의 다리가 많은 사람은 갈 곳이 많다. 그러나 용서의 다리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강을 헤엄쳐서 건너가야 한다. 용서 했는데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다면 또 용서하자. 왜냐하면 용서의 다리가 파괴되면 고립된 인생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어쩌다 한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용서했는데 잊혀 지지 않았다면 또 용서하자. 그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스스로 용서하자. 용서했던 것을 취소하지 말자. 용서, 또 용서, 그리고 또 용서하자. 내 인생의 탄탄대로의 넓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용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