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는 소통하지 않은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막히면 죽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어떤 경우에도 소통해야한다. 김성곤 교수는 그의 저서 ‘리더의 옥편’에서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길을 막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물결이 막혔다가 터지면 사람을 많이 해치게 되나니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물길을 관리하는 자는 그것을 터서 잘 흘러가게 해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 역시 그들로 하여금 소통하게 하여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소통의 과정 중에는 때로는 파멸 음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통해야한다. 소통하지 않으면 막히고, 종국에는 터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용한 침묵의 불통보다는 시끄러운 소통이 낫다.
소통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소통(疏通)은 우통(牛通, 소하고도 통하는 것)이다.” 소귀에 경을 읽으면 통할 수가 없다. 소귀에는 소의 말을 해야 통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야한다. 지상에 있는 백성에게 천상의 말을 하면 통할 수가 없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말과 귀는 마음을 말한다. 마음을 열고 말하면 어려운 것도 쉽게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열고 들으면 어려운 말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해외여행 중에 외국인과 소통하는 방법은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를 사용하는 것이다. ‘궁(窮)하면 통(通)한다’는 말처럼 소하고도 통할 수 있는 것이 소통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소통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고난을 겪으셨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담당하실 수 있으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직접 경험하셨다. 소통의 언어는 공감의 언어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이다. 믿음으로 공감하면 통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새해에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소통하는 ‘우통(牛通)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