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왔다. 부활절에 대한 기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부활절을 ‘Easter’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정확한 유래를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가들은 기독교가 게르만족에게 전해지면서 그들의 봄의 축제인 ‘오스타라’(Eostre/Ostara)의 축제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에서는 부활절을 '오쉬테른'(Ostern)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떤 명칭으로 부르든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에 기인한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그 때 로마의 유대 총독은 빌라도였다. 당시 유대의 왕은 헤롯이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역사에 기록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수백 명이 목격했던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의 첫 열매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에 성도의 몸이 다시 사는 미래 역사적 사건의 첫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이단종파에서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부활에 관련된 관습과 교회의 절기를 사순절에서부터 시작하여 율법화 시켰다. 사순절 기간에는 고행을 하게하고 금식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고 놀이를 금지하였다. 이것은 매우 종교적이고 경건해 보이지만 올바른 신앙을 세우지는 못한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Zwingli)는 사순절 기간에 고기와 소시지를 먹을 수 있다고 파격적으로 가르쳤다. 츠빙글리는 이런 사순절의 과도한 규칙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속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왜곡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규례로 만들어 이벤트로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무디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을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규례가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통곡하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 그러나 부활의 기쁨보다 울음이 먼저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