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세 가지 힘든 것이 있다. 그것을 인생의 삼고(三苦)라고 하는데 고독(孤獨), 고생(苦生), 고통(苦痛)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삼고(三苦)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만큼 삶을 크게 발전시키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삼고(三苦)는 인생의 삼고(三高)라고 할 수 있다. 고독하지 않으면 몰입할 수 없다. 고생과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통과하면서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순금 같은 믿음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예수님은 삼고(三苦)의 삶을 사셨다. 항상 홀로 기도하셨다. 금식기도, 밤샘기도, 새벽기도, 이런 기도는 홀로 드리는 기도다.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졸며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당하셨다. 마지막 십자가의 길은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누구도 대신 갈 수 없는 삼고(三苦)의 길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한복음 2:24). 삼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삼고(三苦)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감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독은 온 몸을 마비시키는 치명적 ‘독(毒)’과 같다고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고독은 영혼의 속삭임을 깨우는 ‘약(藥)'이다.” 고독이 깊어지면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 영혼이 깨어나는 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삼고를 통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다. 고통의 시련 속에서 영혼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삼고(三苦)는 창의적 사고에 자극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을 올바로 가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삼고(三苦)의 길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우리는 지금 삼고(三苦)의 고통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삼고(三高)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