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 대학의 대학원장으로 재직하시는 분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최소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이라는 말은 듣고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저 분’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저 사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놈’이 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물론 다른 사람에게 기억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나를 이렇게 기억해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다만 나와 같이 같은 장소에서 불과 몇 분의 시간을 보냈더라도 나에 대해 어떻게든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진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보다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한다. 진실과 겸손과 친절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최고의 단어이다. 누가 이 모든 것을 갖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로 자처하며 산다면 이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개 젊었을 때는 능력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지위를 가진 사람을 우러러 본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좋아한다.
장애를 딛고 수필가로 우뚝 선, 장영희 교수는 그녀의 저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친절을 베푸는 행위는 결코 밑지는 법이 없다.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내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에게 보여 진 것이 내 삶의 전부도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보았다면 그 사람 편에서는 옳을 수 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는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친절은 외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그렇다면 착하게 살자. 우리의 착함을 친절함으로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