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의 권위와 형식적 종교의 심벌(symbol mark)로 고착화되고 있다. 십자가가 십자가의 능력의 상징인 고난과 인류구속의 뜻을 상실한 채 단순하게 종교의 상징으로만 사용된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계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소멸되지 않고 우리에게 역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묵상해야한다.
십자가는 원래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수를 처형시키는 형틀로 사용하였다. 십자가를 중죄인에 대한 책형(珊刑)의 도구로 사용하기는 페니키아인이 최초라고 추정한다. 그 후에 고대사회에서 여러 나라에서 사형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인은 십자가의 양상이 너무나 잔혹하여 노예나 흉악범 외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국민에게는 십자가책형에 처하지 않았다. 그만큼 십자가의 처형은 고통이 심했다. 십자가에서 당하는 육체적 고통은 얼마나 심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하루 앞둔 전날 밤에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태복음 26:38).
왜, 주님은 이렇게 힘든 십자가를 지셨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6). 인간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주님이 맞으신 채찍의 대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인생의 고통을 치유 받았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능력 자체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종교적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세다. 아이작 왓츠(I. Watts)는 그의 찬송시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상처가 치유되는가? 십자가를 보면서 고통이 사라지는가?